첼트넘 타운 F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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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첼트넘 타운 FC는 1887년 창단된 잉글랜드의 축구 클럽으로, 현재 리그 2에 소속되어 있다. 1985년 얼라이언스 프리미어 리그로 승격했으나 강등되었고, 1996-97 시즌 스티브 코터릴 감독 부임 이후 성공적인 시기를 거쳐 풋볼 리그에 진출했다. 2020-21 시즌에는 리그 2에서 우승하며 리그 1으로 승격했으며, 2023-24 시즌에는 다시 리그 2로 강등되었다. 첼트넘 타운 FC는 2021-22 시즌과 2022-23 시즌 리그 1에서 각각 15위와 16위를 기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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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역사
첼트넘 타운 FC의 역사는 크게 초창기, 풋볼 리그 진입과 승격, 그리고 풋볼 리그 복귀 이후로 나눌 수 있다.
초창기 (1887-1940):(이미 하위 섹션에 상세히 기술되어 있으므로 생략)
풋볼 리그 진입과 승격 (1985-2015):1985년, 첼트넘 타운 FC는 얼라이언스 프리미어 리그(현재의 컨퍼런스 내셔널)로 승격했지만 7년 만에 강등되었다. 스티브 코터릴 감독 부임 이후, 1997-98 시즌에 1998 FA 트로피 결승전에서 사우스포트를 1-0으로 꺾고 FA 트로피 우승을 차지했다. 1998-99 시즌에는 컨퍼런스 타이틀을 획득하며 풋볼 리그에 입성했다.
2001-02 시즌 종료 후, 플레이오프를 통해 디비전 2로 승격했다. 그러나 코터릴 감독은 스토크 시티로 떠났고, 후임 감독들의 부진으로 첼트넘은 다시 강등되었다. 존 워드 감독 체제에서 2005-06 시즌 플레이오프 결승에서 그림스비 타운을 1-0으로 이기고 리그 1으로 승격했다.
2008-09 시즌, 마틴 앨런 감독 부임 후 클럽은 재정 위기를 겪었고, 결국 리그 2로 강등되었다. 마크 예이츠 감독 체제에서 2011-12, 2012-13 시즌 연속으로 플레이오프에 진출했지만, 승격에는 실패했다. 2015년, 첼트넘은 16시즌 만에 풋볼 리그에서 강등되었다.
최근 역사 (2016-현재):첼트넘 타운 FC는 풋볼 리그에서 한 시즌만 보낸 후, 2016년 내셔널 리그 우승을 차지하며 즉시 복귀했다. 개리 존슨 감독은 풋볼 리그 복귀 후에도 팀을 이끌었지만, 2016-17 시즌은 어려움을 겪었다.
2018년, 마이클 더프가 감독으로 부임하여 2019-20 시즌 팀을 플레이오프로 이끌었다. 2020-21 시즌에는 리그 2 챔피언으로 리그 1으로 승격하며 클럽 역사상 처음으로 풋볼 리그 우승을 차지했다.
2021-22 및 2022-23 시즌에 리그 1에서 각각 15위와 16위를 기록했다. 2023-24 시즌 초반 부진으로 다렐 클라크 감독으로 교체되었으나, 결국 리그 2로 강등되었다. 2024년 5월, 마이클 플린이 새로운 감독으로 임명되었다.
첼트넘 타운 FC의 리그별 기록 (2004-2023):
2. 1. 초기 역사 (1887-1940)
첼트넘에는 로빈스 창단 이전에도 축구 역사가 있었다. 1849년, 세 명의 축구 심판(필드에 두 명, 관중석에 한 명)이 경기에 투입된 최초의 사례가 이 도시에서 기록되었다. 하지만 현대적인 클럽은 지역 교사였던 앨버트 클로스 화이트에 의해 1887년에 창단되었다.[1]클럽은 처음 30년간 지역 축구에서 활동했다. 당시 유명 선수로는 전 잉글랜드 국가대표 필립 바흐,[2] 크리켓 선수 길버트 제섭, 형제 찰스 바넷, 에드가 바넷 등이 있었다.
1931년 12월, 클럽은 왓던 로드로 이전했고,[3] 1932-33 시즌에 버밍엄 컴비네이션에 참가하면서 준프로로 전환했다.[4] 새로운 유니폼 색상으로 빨간색과 흰색 줄무늬 셔츠, 검은색 반바지, 빨간색과 흰색 양말을 채택했다.[5] 전 잉글랜드 국가대표 조지 블랙번이 선수 겸 코치로 임명되어,[6] 데뷔 시즌에 팀을 3위로 이끌었다. 다음 해에 클럽은 FA컵에 참가하여 3라운드까지 10경기를 치른 후 첼트넘의 애슬레틱 그라운드에서 기록적인 관중 앞에서 블랙풀에게 패했다.[7] 1934-35 시즌 실망스러운 성적을 거둔 후, 레밍턴 병원 컵 우승[8]과 센터 포워드 제임스 커리어를 발굴하여 볼턴 원더러스로 판매한 것이 유일한 밝은 소식이었다.[9] 클럽은 멤버십을 신청하여 1935-36 시즌에 사우스런 리그에 가입하게 되었다.[10]
타운은 사우스런 리그 데뷔를 두 가지 최초의 기록으로 시작했다. 클럽은 팀 선발에 "완전한 권한"을 가진 첫 번째 감독을 임명했고,[11] 조지 카는 시즌 첫 경기에서 배리를 상대로 모든 선수를 프로 선수로 기용했다.[13] 시즌 개막전에서 좋은 시작에도 불구하고,[14] 타운은 리그에서 웨스턴 섹션 6위, 센트럴 섹션 9위로 시즌을 마쳤다. 하지만 이 시즌에는 FA컵에서 브라이튼 앤 호브 알비온과 재경기를 치르는 등 1라운드까지 진출하는 성과를 거두었다.[15] 이 과정에서 클럽은 치펜햄 로버스를 12-0으로 꺾는 클럽 역사상 최다 점수차 승리를 거두었다.[16]
1936-37 시즌은 카의 마지막 해였으며, 그는 1937년 4월에 사임했다.[17] 사우스런 리그가 단일 디비전으로 전환되면서 타운은 11위를 기록했으며, 더비 카운티로 이적하기 전 미래의 잉글랜드 국가대표 팀 워드가 출전했다.[18] 구단은 유한 회사로 전환하려 했다.[19]
카의 후임은 전 아스널 공격수 제임스 브레인이었다.[20] 클럽의 두 핵심 선수, 클리프 랭이 질병으로, 어니 윌리엄스가 부상으로 이탈하면서 브레인은 리그 11위 이상의 성적을 거두지 못했다.[21] 그러나 그는 팀을 FA컵 1라운드까지 이끌었고, 왓포드에게 3-0으로 패했다.[22] 한편 뉴포트 카운티는 웨일스 컵 8강에서 타운을 탈락시켰다.[23] 팀의 주전 선수였던 윙어 클리프 손리와 골키퍼 잭 휠러는 각각 브리스톨 시티[24]와 버밍엄으로 이적했다.[25] 재정난 이후 선수, 주주 및 서포터의 기부로 클럽의 존폐 위기를 넘겼다.[26]
첼트넘은 1938-39 시즌을 위해 "로빈스"로 이름을 변경하고, 로빈 문양이 있는 흰색 셔츠와 빨간색 소매를 착용했다.[27] 또 다른 FA컵 여정은 카디프 시티가 왓던 로드에서 1-1로 비긴 후 재경기에서 승리하면서 1라운드에서 리그 팀에게 막혔다.[28] 리그에서 타운은 또다시 하위권으로 시즌을 마쳤다. 16번의 리그 승리 모두 홈에서 거두었고, 첼트넘은 왓던 로드 원정에서 6번만 패배를 면했다. 다시 한번, 클럽의 폐쇄 위협이 닥쳐왔다.[29]
1939-40 시즌의 유망한 시작은 제2차 세계 대전의 발발로 중단되었다.[30] 잠시 중단된 후, 사우스런 리그는 종종 게스트 선수를 포함한 제한적인 지역 프로그램을 수립했으며,[31] 첼트넘은 리그 웨스턴 디비전에서 최하위권으로 시즌을 마쳤다. 시즌 종료 시 클럽은 "추후 공지가 있을 때까지 더 이상 경기를 주선하지 않을 것"이라고 발표했다.[32]
2. 2. 1985-1999
1985년, 첼트넘 타운 FC는 얼라이언스 프리미어 리그(현재의 컨퍼런스 내셔널)로 승격했지만 7년 만에 강등되었다.스티브 코터릴 감독의 1996-97 시즌 부임은 클럽의 성공적인 시기를 알리는 신호탄이었다. 코터릴은 첼트넘 타운 FC 역사상 가장 성공적인 감독으로 평가받는다. 그는 부임 4개월 만에 클럽을 사우스런 풋볼 리그 프리미어 디비전 준우승으로 이끌었다. 비록 그레스리 로버스가 컨퍼런스 멤버십에 필요한 경기장 수용 능력을 충족하지 못해 승격이 좌절되었지만, 첼트넘 타운 FC는 챔피언 자격으로 풋볼 컨퍼런스로 승격했다. 1997-98 시즌, 첼트넘 타운 FC는 컨퍼런스에서 준우승을 차지하며 1998년 4월 말까지 챔피언 핼리팩스 타운을 바짝 추격했다. 같은 해, 1998 FA 트로피 결승전에서 사우스포트를 1-0으로 꺾고 웸블리 스타디움에 26,837명의 관중을 불러모으며 FA 트로피 우승을 차지했다. 1998-99 시즌, 첼트넘 타운 FC는 마침내 컨퍼런스 타이틀을 획득하며 풋볼 리그에 입성했다.[33]
2. 3. Football League (1999-2015)
첼트넘은 디비전 3에서 두 번의 중위권 성적을 거둔 후, 2001-02 시즌 종료 후 디비전 2로 승격(디비전 3 플레이오프를 통해)했다. 승격 직후 코터릴은 첼트넘을 떠나 스토크 시티 감독으로 합류했다.[34]첼트넘은 코터릴을 대신하여 1994년 키더민스터 해리어스에서 컨퍼런스 챔피언십에서 우승한 그레이엄 올너를 1군 코치로 임명했다. 올너와 코터릴의 수석 코치였던 마이크 데이비스는 2003년 1월, 디비전 2 하위권에 머물면서 6개월 만에 해고되었다.[35] 첼트넘은 1988년 윔블던에서 FA컵 우승을 포함한 업적으로 잉글랜드 축구에서 가장 경험이 많은 감독 중 한 명인 바비 굴드에게 눈을 돌렸다.[36] 첼트넘은 계속 고전했고, 시즌 마지막 경기에서 패배하면서 단 한 시즌 만에 디비전 3로 강등되었다.[37] 굴드는 2003년 11월 첼트넘 타운 감독직에서 사임했고, 존 워드가 그를 대신했다.[38]
2005-06 시즌 동안 방문 팬을 위한 새로운 스탠드(칼스버그 스탠드)가 추가되었다. 첼트넘은 시즌을 5위로 마감하여 플레이오프에 진출했다. 준결승에서 와이컴비 원더러스를 원정에서 2-1로 이겼고, 와던 로드에서 열린 2차전에서는 0-0으로 비겼다.[39] 플레이오프 결승에서 그림스비 타운을 1-0으로 이겨 리그 1 진출을 확정했다. 2006년 5월 28일 밀레니엄 스타디움에서 열린 경기에 29,196명이 참석했다.[40]
첼트넘은 리그 1에서 길링엄을 상대로 1-0으로 승리하며 시작했다.[41] 첼트넘이 포트 베일에 3-0으로 패한 후, 존 워드 감독은 리그 1팀 칼라일 유나이티드와 4년 계약을 맺었다고 발표했다. 시즌의 하이라이트는 리즈 유나이티드를 두 번이나 이긴 것이었다.[42][43] 첼트넘은 와던 로드에서 던캐스터 로버스를 2-1로 이기면서 시즌 마지막 날에 잔류를 확정지어 상대팀의 자동 승격을 막았다.[44]
2008-09 시즌 초, 키스 다운잉은 첼트넘 타운을 떠났고,[45] 마틴 앨런이 그를 대신했다.[46] 앨런의 팀은 클럽 기록인 7연패로 시작하여 15경기 연속 무승을 기록했다. 클럽은 행정 처분과 그에 따른 10점 감점을 간신히 면했고, 앨런은 클럽의 모든 선수들이 매물로 나와 있다고 밝혔다.[47] 시즌은 첼트넘이 리그 1에서 세 시즌을 보낸 후 시즌 종료 전날 리그 2로 강등되면서 100골 이상을 실점하며 마무리되었다.[48]
첼트넘은 2009-10 시즌 첫 경기에서 그림스비 타운을 2-1로 이겼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순위가 급격히 하락했다. 10월 20일, 마틴 앨런은 나이트클럽 경비원을 인종 차별적으로 학대했다는 의혹으로 "가드닝 휴가"를 받았고, 수석 코치 존 스코필드가 임시 지휘를 맡았다.[49][50] 앨런은 공식적으로 비위 행위에 대해 무혐의 처분을 받았지만, 12월 초 상호 합의 하에 클럽을 떠났다.[51] 전 첼트넘 주장 겸 키더민스터 감독인 마크 예이츠가 2009년 12월 22일 감독으로 임명되었다.[52] 첼트넘은 시즌 나머지 기간 동안 계속 고전했고, 시즌 마지막 날에야 강등을 면했지만, 강등된 팀보다 4점 앞섰다.[53]
예이츠는 첼트넘에서 첫 정규 시즌을 앞두고, 수비수 셰인 더프를 포함하여 8명의 선수를 방출하면서 스쿼드를 개편했는데, 더프는 클럽에서 10년을 보냈다. 2010-11 시즌은 초반에는 성공적인 것으로 입증되어, 로빈스는 플레이오프 순위에 근접해 있었지만, 시즌 후반에 붕괴되어 2011년에 26경기에서 단 5승만을 거두며 17위로 마쳤다.[37]
2011-12 시즌 첼트넘은 리그컵 1라운드에서 패했지만, 풋볼 리그 트로피 남부 8강에 진출했고, 토트넘 홋스퍼와의 FA컵 3라운드에서 유리한 경기를 치렀다.[55] 6위로 시즌을 마친 첼트넘은 토키 유나이티드를 홈에서 2-0, 원정에서 2-1로 이기면서 플레이오프 준결승에 진출했다. 2012년 5월 27일 웸블리 스타디움에서 열린 플레이오프 결승전에서 크루 알렉산드라가 24,029명의 관중 앞에서 닉 파월과 바이런 무어의 골로 첼트넘 타운을 2-0으로 꺾었다.[56]
2012-13 시즌 FA컵에서 첼트넘은 프리미어 리그 팀 에버턴에 5-1로 패했다.[57] 2012년 11월 6일, 마크 예이츠 감독은 리그 선두인 길링엄과의 경기에서 1-0으로 승리하며 클럽 감독 150번째 경기를 치렀다. 첼트넘은 시즌 마지막 날 3위 승격 자리를 로더럼 유나이티드에 내주면서 5위를 기록, 다시 한 번 시즌 종료 플레이오프에 진출했다.[58] 2012-13 시즌에는 홈 리그 21경기 무패 행진이 포함되었다.[59] 플레이오프에서 첼트넘은 노샘프턴 타운을 상대로 홈과 원정 모두 1-0으로 패했다.[60]
두 시즌 연속 플레이오프에 진출한 후, 첼트넘 타운의 2013-14 시즌은 어려움을 겪었다.[61] 3시즌 연속 플레이오프 진출에 대한 기대는 3월에 끝났다. 시즌의 하이라이트는 프리미어 리그 팀 웨스트햄 유나이티드 원정 경기였으며, 클럽은 결국 업튼 파크에서 2-1로 패했다.[62] 첼트넘은 2013-14 시즌을 17위로 마쳤다.
2014년 11월 25일, 마크 예이츠는 5년 가까이 팀을 맡은 후 첼트넘 타운에서 해고되었다.[63] 첼트넘은 이후 폴 버클을 팀 감독으로 임명했지만,[64] 그는 79일 만에 해고되었다.[65] 2015년 3월 게리 존슨이 감독으로 임명되었다.[66] 2015년 4월, 평생 팬이었던 브라이언 제이콥이 클럽 서포터스 트러스트에 222000GBP를 유언으로 기부하면서, 회원들은 이 돈을 클럽에서 제안한 이사회 영구 의석을 수락하는 데 사용하기로 투표했다. 축구 팬 클라이브 고윙이 이후 선출되었다. 클럽은 또한 제이콥을 기리기 위해 스탠드와 팬들이 뽑은 올해의 선수상을 명명할 것이라고 밝혔다.[67] 2015년 4월 25일, 첼트넘 타운은 슈루즈버리 타운에 와던 로드에서 패했고, 이는 16시즌 만에 첼트넘이 풋볼 리그에서 강등되었다는 것을 의미했다.[68]
2. 4. Return to the Football League (2016-)
첼트넘 타운 FC는 풋볼 리그에서 한 시즌만 보낸 후, 2016년 4월 16일 FC 할리팩스 타운과의 홈 경기에서 2-0으로 승리하며 즉시 복귀를 확정지었다.[69] 팀은 101점을 획득하며 최다 득점과 최소 실점을 기록, 챔피언이 되었고 2위인 지역 라이벌 포레스트 그린 로버스를 승점 12점 차로 따돌렸다. 1월에 영입된 댄 홀먼은 로빈스에서 단 18경기 만에 16골을 기록하며 내셔널 리그 골든 부츠를 공동 수상했다. 여름에 영입된 대니 라이트는 시즌을 22골 11도움으로 마무리하며 팬들이 뽑은 올해의 선수상을 수상했다.[70]개리 존슨 감독은 풋볼 리그로 복귀하면서 이전 해의 내셔널 리그 우승을 이끌었던 선수들을 대부분 신뢰했다. 2016-17 시즌은 많은 선수들이 리그 2로의 승격에 예상보다 어려움을 겪으면서 고전했다. 와든 로드 경기장도 서포터들과 방문 감독들로부터 비판을 받았는데, 이는 높은 사용량(2016-17 시즌 동안 글로스터 시티가 첼트넘에서 공동으로 홈 경기를 치렀다)을 감당하기 어려웠기 때문이다.[71] 3월부터 존슨이 심장 우회 수술로 인해 병가를 내고, 그의 어시스턴트 러셀 밀턴이 지휘하면서 봄철에 들어서면서 결과가 다소 개선되었다.[72] 로빈스는 시즌 종료를 앞둔 경기에서 하틀풀 유나이티드를 1-0으로 꺾으며 리그 잔류를 확정지었다.[73] 그들은 시즌을 21위로 마쳤다.
오프 시즌 동안 회복한 개리 존슨은 복귀하여 2년 계약을 체결했다.[74] 그는 11명의 선수를 방출하며 선수단을 대대적으로 정리했다.[75] 2017-18 시즌에 클럽은 전년도보다 단 1점 더 많은 51점을 획득했고, 리그 2에서 17위를 기록했다. 이 해의 가장 큰 성공은 수단 출신 공격수 모하메드 아이사였다. 논리그 축구에서 자유 이적으로 영입된 아이사는 시즌 동안 첼트넘에서 23골을 기록했고, 2018년 7월에 100만 파운드 이상으로 추정되는 이적료(클럽 최고 판매 기록)를 기록하며 브리스톨 시티로 이적했다.[76] 시즌 말에 오랜 기간 클럽 회장을 역임한 폴 베이커는 20년 만에 이 자리에서 물러나 앤디 윌콕스에게 회장직을 넘겨주었다.[77]
2018년 9월 10일, 첼트넘의 전 선수 마이클 더프가 개리 존슨의 퇴임 후 임명되었다.[78] 더프는 로빈스를 16위로 이끌었다.[79] 다음 2019-20 시즌은 매우 성공적이었으며, 4위를 기록하며 자동 승격을 아쉽게 놓쳤다. 최종 리그 순위는 코로나19 팬데믹으로 인한 혼란으로 인해 경기당 승점 기준으로 결정되었다.[80] 첼트넘은 플레이오프에서 노샘프턴 타운에게 패하여 종합 스코어 3-2로 탈락했다.[81]
2020-21 시즌에 첼트넘은 리그 2에서 5시즌을 보낸 후 챔피언으로 리그 1으로 복귀했다. 코로나19로 인한 지속적인 혼란으로 인해 2020-21 시즌의 대부분의 경기는 무관중으로 진행되었다. 로빈스는 FA컵에서 2006년 이후 처음으로 4라운드에 진출했지만, 결국 2020–21 프리미어리그 챔피언 맨체스터 시티에게 아쉽게 패했다. 첼트넘은 경기가 10분 남았을 때 앞서고 있었지만 결국 3-1로 패했다.[82] 첼트넘은 칼라일 유나이티드와의 홈 경기에서 1-1로 비기면서 리그 1 복귀를 확정지었다.[83] 2021년 5월 8일, 첼트넘은 최종전에서 해로게이트 타운을 4-1로 꺾고 리그 2 챔피언십을 확정하며 클럽 역사상 처음으로 풋볼 리그 우승을 차지했다.[84]
2021-22 및 2022-23 시즌에 첼트넘은 리그 1에서 각각 15위와 16위를 기록했다.[37] 해당 수준에서 운영되는 가장 작은 클럽 중 하나인 첼트넘은 2시즌 동안 총 43골을 기록한 공격수 알피 메이의 활약에 크게 도움을 받았다.[85][86] 2021-22 시즌이 끝날 때, 수석 코치 마이클 더프가 반슬리로 떠났고, 웨이드 엘리엇이 1군 코치에서 내부 승진하여 그의 자리를 대신했다.[87]
2023-24 시즌 초에 첼트넘은 개막 11경기에서 한 골도 넣지 못하며 풋볼 리그 기록과 타이를 이뤘다.[88] 이러한 시즌 초반의 부진으로 인해 엘리엇은 해고되었다.[89] 그는 다렐 클라크로 교체되었지만, 경기력이 크게 향상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첼트넘은 시즌 마지막 날에 리그 2로 강등되었다.[90][88] 클라크는 시즌이 끝날 때 반슬리로 떠났다.[91] 2024년 5월 31일, 마이클 플린이 첼트넘 타운 감독으로 임명되었다.[92]
[98]
3. 선수
2024년 4월 29일 기준[99]
첼트넘 타운 FC는 초창기 30년 동안 지역 축구 무대에서 활동했다. 이 시기 잉글랜드 국가대표 필립 바흐[2], 크리켓 선수 길버트 제섭, 찰스 바넷, 에드가 바넷 등이 팀을 거쳐갔다. 1934-35 시즌에는 제임스 커리어를 볼턴 원더러스로 이적시켰다.[9]
1936-37 시즌에는 팀 워드가 더비 카운티로, 1937-38 시즌에는 클리프 손리와 잭 휠러가 각각 브리스톨 시티[24]와 버밍엄[25]으로 이적했다.
'''역대 올해의 선수'''
